이탈리아를 오래된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불과 150년 전에 생긴 나라다.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들은 서로 다른 군주가 지배하는 다른 나라였고, 대개 적대적 관계였으며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같은 이탈리아어를 일상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2차 대전 이후의 일이며, 아직도 가정에서는 공용어가 아닌 각자의 고향 말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탈리아인이 아닌 밀라노 사람, 로마 사람, 시칠리아 사람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부산과 광주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 과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이탈리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음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음식은 서로 다른 것과 볼로냐와 시칠리의 음식이 다른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문화 특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계기는 요리였다.
요즘 팬데믹으로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게 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우리 부부에게 집밥은 보통 주말에나 한 번씩 해 먹는 특별한 일에 가깝다. 요리에 재미도 재능도 없는 아내보다는, 그래도 관심은 있는 내가 보통 요리를 담당하는데, 주말 아침은 파스타를 해 먹는 일이 많다. 재료 준비부터 플레이팅까지 20분 내외면 뚝딱 만들 수 있고 맛도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일이 잦아지며, 좀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쇼핑을 하다 보니 이탈리아 식재료의 다양함도 알게 되었고, 피자나 포카치아도 구워보며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 시작하며 관심이 더 생겼다.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에는 어떤 요리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이탈리아 요리는 지역마다 그 차이가 커서, 하나의 범주에 넣는 것이 중식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실버스푼 같은 유명한 요리책을 찾아기도 했으나, 이탈리아 요리의 특성과 체계를 이해하기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게 참고할만한 자료를 찾는 와중에 ’ 마르첼라 하잔’의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마르첼라 하잔은 볼로냐 사람으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으며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았다. 요리에 관심 있던 그녀는 다양한 요리를 탐구하는 과정에 중식도 배우게 되었으나 갑자기 강사가 중국으로 돌아가 버려 클래스가 중단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 하잔에게 이탈리아 요리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아파트에서 이탈리아 요리와, 문화, 역사를 아우르는 쿠킹클래스를 시작하였고, 이것이 이 책 ‘정통 이탈리아 요리의 정수’가 나오게 된 계기다. (어쩐지 줄리아 차일드의 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과 비슷한 스토리다. 이 책도 가끔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돈다.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 요리의 고전 격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 유명세에 비하여 사진도 한 장 없고 레시피도 친절하지 않는 등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요리책들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요리를 범주화하고 그 원리와 체계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며, 재료에 대하여, 그리고 조리의 원리를 상세히 살 명하는 등 내용은 다른 그 어느 책 보다 알차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 책의 특별한 점 1 - 체계적인 구성
이 책은 ‘이탈리아 요리의 토대’부터 시작하여 전체. 수프, 파스타, 리소트.. 등으로 장을 할애하여 전체적인 원리를 설명하며, 그 아래 대표적인 재료/지역별 레시피를 소개하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예를 들어.. 수프 장 구성을 보면, 남쪽과 중부, 그리고 북쪽의 재료와 종류의 차이와 수프의 여러 갈래를 개론으로 설명한 후 대표 레시피 여러 가지를 설명한다. - 로마냐식 채소수프, 밀라노식 수프, 수프에 사용하는 크로스티니 (이탈리아식 크루통) 등등 - 고민을 많이 한 체계적인 구성이다. 각 레시피는 보통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미네스트로네 알라로마뇰라 - 로마냐식 채소 수프
“내 고향 로마냐의 가정집들에서 미네스트로네를 만들 때 쓰는 방법이다. 제철 채소에 항상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당근, 양파, 감자를 맛있는 육수에 넣어 몇 시간 동안 천천히 끓인다. 완성된 수프에서는 특별히 한 채소의 맛이 도드라지지 않고, 응축되어 녹아 있는 모든 채소의 맛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특별한 점 2 - 다른 곳에서 얻기 힘든 조언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이탈리아 요리의 토대라는 첫 번째 장이다. 이 장에서는 바투토와 소프리토부터 시작 - 많은 이탈리아 요리의 베이스가 되는 양파, 마늘, 샐러리, 당근, 고기 등을 다져서 볶는 것을 말한다- 하여 이탈리아 요리의 토대를 가르쳐준다. 이어 안초비, 발사믹, 바질 등 기본 재료를 소개하는데 마치 자상하고 호탕한 성격의 할머니에게 요리를 배우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충만해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가격을 할인하는 안초비에 유혹되지 마라. 정말로 좋은 안초비는 결코 저렴하지 않다. 가격이 싼 경우, 안초비라고 불러서는 안 될 정도로 파삭파삭하고 소금기에 쩐 아주 끔찍한 상태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안초비는 잘게 다진다. 그래야 쉽게 녹고, 다른 재료에 그 풍미가 스며든다. 너무 뜨거운 기름에 다진 안초비를 넣어서는 안 되는데, 녹지 않고 튀겨지면서 딱딱해지고, 맛은 써지기 때문이다."
"진짜 발사믹 식초는 아주 소량을 쓴다. 샐러드에 보통 식초는 절대 발사믹 식초를 대체할 수 없다… (중략)… 발사믹 식초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발사믹 식초의 풍미가 서사하는 놀라움과 강렬함이 자주 반복되면 오히려 지겨워질 테니 말이다."
"마늘을 볶고 있을 때는 절대 눈을 떼서는 안 되며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 두어서도 안 된다. 불쾌한 냄새와 맛이 날 수 있다. 요리의 균형 잡힌 풍미를 위해 특별히 강렬한 마늘향이 필요한 경우에만, 마늘을 호두 껍데기 정도의 옅은 갈색이 될 때까지 익힌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리에서 마늘에 허용된 가장 짙은 색은 옅은 황금색이다."
이 책의 특별한 점 3 - 사진보다 더 도움이 되는 삽화
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지만 대신 필요한 곳에 삽화가 세밀하게 들어가 있다.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하는데 단계별로 나뉜 사진보다 이러한 삽화가 더 도움이 된다.

나는 주제와 형식에 관계없이 잡다하게 여러 책을 보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지고 있는 요리책은 좀 생뚱맞은 편이다. 가끔 지인이 와서 책장을 보고 의아해하기도 한다. 거의 요리를 해 먹지 않는 집 책장에 두툼한 - 사진도 없고 가격도 저렴하지 않은-요리책이 여러 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요리를 많이 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더라도 이런 요리책은 소장하고 정독할 가치가 있다. 이런 좋은 책들은 발견하는 대로 사 들여야 한다.
요즘처럼 추운날이 이어지는 겨울 밤, 나는 이 책을 꺼내 보는 일이 잣다. 본격적인 레시피가 나오기 전에 저자는 멋진 표현으로 이 음식의 유래와 추억을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방금 전 읽은 레시피 한 소절을 옮겨적어본다.
로마냐식 레드 와인에 조린 밤
밤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는 낮은 짧고 저녁이 길고 차가울 때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살던 대학생 시절, 나는 그런 날에 밤을 삶고 있는 냄비, 휴대용 병에 담긴 거칠고 어린 와인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벽난로 옆에 모이려고 겨울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내 아버지는 밤과 와인이 사람을 취하게 한다고 했다. 밤이 와인보다 더 취하게 하는지 증명된 바는 없지만, 하나의 맛이 또 다른 하나를 자꾸만 홀짝거리게 하거나, 그 반대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둘을 번갈아 자꾸만 입에 넣어가며, 그 저녁을 밤 한입으로 끝낼 것인지, 와인 한모금으로 끝낼 것인지 결정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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